영화 제작자, 발명가, 제작자, 감독, 작가, 풍경 사진가, 영화 제작자 작가 세실 M. 햅워스(Cecil Milton Hepworth)는 세계 2차 대전 이전의 초기 영국 영화의 선구자였다. 그는 다른 영국의 선구적 영화 제작자보다 영화 사업에서 더 오래 살아남았다. 그의 활동기간 동안, 햅워스는 영국 영화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들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의 영화사 설립
세실 햅워스는 1874년 3월 19일 런던 남부 램버스에서 유명한 마술쇼 맨 T.C. 햅워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화산업의 초기에, 그는 산업의 변방에서 일했다. 그는 왕실 사령부의 영화 촬영 공연에서 버트 에이커스를 도왔고, 1897년에 영화에 관한 최초의 영국 책인 '애니메이션 사진, 영화 촬영의 ABC'를 썼다.
1890년대 후반에 햅워스는 그의 사촌 몬티 윅스와 함께 월튼온템즈의 허스트 그로브에 있는 한 집에 그의 영화 회사를 설립하여 그것을 '헵워스 앤 코'라고 부르고 '헵윅스'를 그들의 트레이드 로고로 삼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헵워스 앤 코'는 많은 풍경 영화들과 50피트 실제 영화들을 제작했고, 그 뒤를 이어 헵워스가 카메라맨, 감독을 맡은 야심찬 800피트짜리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제작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첫 대중적 성공작이었다. 그 무렵인 1901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이 촬영되기도 했다.
성공적인 사업운영
1904년에 회사는 '헵워스 제조회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햅워스는 감독활동을 중단했다. 루이스 피츠하몬이 감독직을 이어받아 회사는 매우 높은 수준의 우수한 사진과 단순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들을 상영했다. 일주일에 세 편 이상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이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폭 넓은 호소력을 보여주었다.
1905년 햅워스는 '로버'라는 예명을 가진 최초의 영국 영화배우 콜리를 선보였다. 루이스 피츠하먼과 함께 만든 '로버에 의한 구출'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뒤를 이어 1906년 영화 '블랙 뷰티'의 말인 '로버'와 '블랙 뷰티'가 모두 영화 '덤 세이시티'에서 1907년 힘을 합쳤다. 이 초기 영화들의 성공으로 큰 돈을 번 회사는 월튼 온 테임즈에 지은 스튜디오에 투자할 수 있었다.
헵워스 영화는 두 명의 여배우인 크리시 화이트와 알마 테일러를 영국의 스타로 만들었다. 주인공의 발랄함과 장난기로 가득 찬 '틸리 시스터즈'에서 생기있는 젊은 여성을 연기한 그들은 그 후로도 일련의 영화들의 성공으로 관객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헵워스 픽처 플레이즈'는 1920년대까지 완만한 성공을 거둔 영화들을 계속 만들었다. 비록 '알프의 버튼'(1919)과 같은 코미디가 미국에서조차 엄청난 인기를 얻었음이 증명되었지만, 그 당시 그의 영화 주제는 여전히 대부분 멜로드라마였다.
투자실패와 회사 매각
당시 햅워스는 촬영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넓은 부지가 있는 지역 시골집 '오트랜즈 로지 에스테이트'를 구입하면서 대규모 스튜디오 단지를 지을 계획이었다. 이 확장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주식 투자설명서를 발표했다. 출시 당시의 이 투자설명서는 신청자 수가 저조했고, 이에 햅워스는 이미 진 빚을 갚기 위한 자본을 조달할 수 없음을 깨닭게 되었다.
1923년에 완성된 'Comin' Thro the Rye'는 햅워스가 이것을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겼고 이것이 자신의 사업을 되살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고 1924년 6월에 '헵워스 픽처 플레이어'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결국 회사는 크게 저평가 되어 팔렸다.
영국 영화사에서의 위상
햅워스는 영화 역사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실 그럴만도 했다. 말년에 그는 '잉글리시 시네마의 탄생'이라는 강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순회강연을 했다. 1922년 5월 19일 '버라이어티'가 그에 대해 말했듯이, '그의 본성상 그에게서는 쇼맨의 상업성 보다는 예술가적 기질이 더 크게 발휘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1953년 2월 9일 미들섹스의 그린포드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의 매력은 여전하다. 그의 영화에 대한 관심과 오늘날 웹사이트들에서 보여주는 그의 삶과 영화 작업에 대한 정보를 보고 있자면, 20세기 초 영화 제작에서 그의 독특한 선구적 스타일을 재확인 할 수 있다.